흑백과 칼라에 대한..조금 긴..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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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엔가..일@랑 흑백사진에 대해 나눈 몇마디중에,
세상엔 흑백이 있을뿐, 색이란 없는것이라고 이야길 한적이 있져.
그 이야길 하게된 배경이 되는 글이 바로 아래에 나오는 이야김다. 신영복님의 “나무야 나무야”라는 작은 책에 나오는 한 소절인데여,
갑자기 제가 올린 흑백사진을 보다가, 생각이 나서리…
열분들께서두 한번쯤 읽어보시면 어떨까 해서
제가 직접 워드로 작업해서 올려봤습니다.
어디서 퍼온글이 아니므로… 저의 수고*^^*를 생각하시여,
한번쯤..읽어주시길….^_^a

진리는 간데 없고, ‘색’만 어지러이.

백담사의 만해와 일해

백담사의 밤은 칠흑 같았습니다.
나는 그깊은 어둠속에 누워 세상모르고 잠들어있었던가 봅니다.
얼마나 잤을까 난데없는 총소리에 소스라쳐 일어나 법당 밖으로
뛰쳐나왔습니다.
그러나 바깥에는 아무일도 없었습니다. 교교한 달빛 아래 노스님
한분이 비를 들고 돌계단을 쓸고있을 뿐 적막강산이었습니다.

“스님. 분명히 총소리가 울렸었는데요.”
“그건 총소리가 아니라 대숲이 불타는 소리야.”
“대숲이 불타는 소리?”
나는 절 주위를 바라보았습니다. 대숲은 보이지 않고
정정한 소나무숲이 백담사를 두르고 있었습니다.

스님은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긴 대빗자루로 천천히 돌계단을
쓸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스님. 쓸고 계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피야! 피! 밤마다 대숲이 불타고 피가 떨어지지.”
스님의 음성은 멀리서 들려오는 듯 낮고 삭막한 것이었습니다.
나는 고개를 들어 잿빛 하늘에 거대한 검은 날개를 펴고 있는 법당을 올려다보았습니다.
날아갈 듯한 처마밑으로 법당의 반듯한 이마에 커다란 편액扁額이 걸려있었습니다.
極.樂.寶.殿.(극락보전)

피는 이 편액의 글씨에서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돌계단에 떨어지고 있는 것은 붉은피가 아니라 검은먹물이었습니다.

“스님, 이것은 피가 아닙니다. 세상에 검은피가 어디있습니까.”
“검은피를 모른다고? 세상에는 흰피와 검은피밖에 없는거야.”
나로서는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았습니다. 다시 한번 편액을 올려다보았습니다.
그런데 양각된 편액의 글씨는 흰색도 아니고 검은색도 아닌 붉은색이었습니다.
“스님, 편액을 붉은글씨로 쓰다니 그런법도 있습니까?”
“그럼 자네가 그린 묵죽(墨竹)처럼 새카만 대나무도 있다더냐?
색은 마음이 보는 것. 세상에는 흰색과 검은색밖에 없는 것이야.
선(善)이 아니면 악(惡)이야. 중간은 없어.”
“그렇지만 스님. 스펙트럼에는 흑과 백이 없지 않습니까?”
‘아무렴 없지. 흑과 백은 아예 색이 아니야.
색을 본다는 것은 우산을 먼저보고 비를 나중에 보는 어리석음이야. 색은 흑백을 풍부하게 하는데다 써야 하는거야.
그렇지 않으면 사람을 홀리고 어지럽게 할 뿐이야.
‘진리’는 없고 ‘진리들’만 난무하게 되는것이야.”

당신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사람의 눈동자는 95%가 흑백을 인식하는 세포로 구성되어 있고,
색깔을 인식하는 부분은 불과 5%밖에 불과하다는 당신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어느새 스님도 어디론가 사라지고 백담사 너른 절마당에는 나혼자만 서있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어디선가 긴 신음소리가 나를 동이려는 듯 흘러나왔습니다.
나는 귀를 막았습니다. 그리고 한시바삐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으로 서둘러 뒷걸음질쳤습니다.
바로 그때 ‘찡’하고 얼음장이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무거운 돌이
나의 등을 내리쳤습니다. 나는 어깨를 감싸쥐고 비명을 지르며 굴렀습니다.
거대한 석상이 손에 죽비를 들고 쓰러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아..꿈이었습니다.
‘그만 일어나세요’ 이군이 나의 어깨를 흔들고 있었습니다.
나는 사방을 휘둘러보았습니다. 백담사는 꿈속에서처럼 적막하였습니다.
나는 천천히 일어나 꿈속의 일들을 확인하기 위하여 편액 아래로 다가갔습니다.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법당의 지붕은 더욱 웅장하였습니다.
그 빼어난 처마의 끝은 설악의 상봉을 어루만지고 있었습니다.

極.樂.寶.殿.(극락보전)
꿈속에서 핏방울을 떨어뜨리고 있던 편액의 글씨를 한자 한자 읽어나갔습니다..
나는 거기 찍혀있는 낙관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일해 전두환(日海 全斗煥)
전두환 전대통령의 필적이었습니다. 따로 방서(傍書)를 하지않고
전서(篆書)로 된 낙관만 찍혀있어서 얼른 알아보기가 어려웠지만 전두환 대통령의 글씨였습니다.
아마 6공화국이 시작되면서 이곳에 은거하는 동안 써서 걸었던 편액이 틀림없었습니다.
꿈속에서와는 달리 글자는 붉은색이 아니라 은은한 금빛이었습니다.
검은피가 떨어지던 화강암 돌계단에는 아무런 흔적이 없었습니다.
나는 뒤로 물러나 나를 내려친 돌비석 앞으로 다가갔습니다.
나지막한 대석위에 그리 크지않은 자연석 시비(詩碑)가 서 있었습니다.

[나룻배와 행인]
만해 한용운 (萬海 韓龍雲)의 시비였습니다.
나를 내려친 사람이 바로 만해 선생이었던가.
나는 만해의 시비에서 몸을 돌려 다시 일해의 편액을 바라보았습니다.
절마당을 사이에 두고 만해와 일해는 서로 건너다보고 있었습니다.
나는 이 기구한 만해와 일해의 대치를 한동안 지켜보았습니다.
암울한 식민지에서 나라의 독립과 중생의 제도를 고뇌하며 만해가
뼈를 깎던 수도장이 바로 이곳 백담사였습니다.
백담사에 얽힌 세월의 무상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나는 차가운 돌에 새겨진 만해의 시를 읽어나갔습니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당신은 흙발로 나를 짓밟습니다.

이렇게 시작되는 만해의 시는
“그러나 당신이 언제든지 오실줄만은 아러요.”로 끝나고 있었습니다.

설악산 봉우리는 이름 그대로 벌써 머리에 하얗게 눈을 이고 있었습니다.
꽁꽁 얼어붙은 계곡에는 군데군데  찢어진 얼음장 사이로 여울물이 외치고 있었습니다.

나는 만해 시비와 일해 편액이 둘다 보이는 곳에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이군이 말했습니다.
흑백으로 한 장 찍겠습니다. 사진은 흑백이 진짜지요.
꿈속의 노스님 이야기가 다시 떠올랐습니다.
‘색이란 사람을 홀리고 어지럽게 할 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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